조용한 바람이 불던 날, 책상 위의 사직서
회사를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던 날은 생각보다 평범했어요. 특별한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누군가가 등을 떠민 것도 아니었습니다. 바람이 조금 차가웠고, 점심시간에 혼자 옥상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제 좀 내려놓아야 하지 않을까.”
늘 그렇듯 커피는 쓰고, 마음은 더 씁쓸했죠. 몇 달 전부터 희망퇴직 이야기가 나오긴 했지만, 설마 내가 그 대상이 될 줄은 몰랐거든요. 막연하게 ‘내일도 출근하겠지’ 하면서 살았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주변 책상들이 하나둘씩 정리되더라고요.
저도 어느새 망설임 없이 이름 석 자 써서 퇴직 동의서에 도장을 찍고 있었습니다. 20년 가까이 일해온 자리에 작별을 고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은 멍했습니다. 마치 오래된 연인과 헤어지면서도 실감이 안 나는 기분이었달까요.
그렇게 집으로 돌아온 첫날, 거실 소파에 앉아 하루 종일 리모컨만 들었다 놨다 했어요. 무슨 채널을 보고 있었는지도 기억이 안 납니다. 아내는 묻지도 않았고, 저도 굳이 말하고 싶지 않았죠.
괜히 냉장고 문만 여러 번 열었다가 닫았고, 마트에 가서 쓸데없이 장을 봤습니다. 무언가 하고는 싶은데, 아무것도 손에 안 잡히는 날이었어요.
아주 우연히 마주한 ‘중장년 전직지원제’라는 말
그렇게 며칠을 보냈습니다. 집에만 있으니 하루가 길어지더군요. 해는 금방 지고, 시간은 유독 천천히 흘렀어요. 스마트폰으로 ‘중년 퇴직 후 진로’, ‘중장년 재취업’, ‘할 수 있는 일’ 이런 검색어들을 반복적으로 치며 시간을 보냈어요.
그러다 어느 날, 포털 뉴스 자막 아래에 작게 뜬 글귀 하나가 눈에 들어왔어요. ‘중장년 전직지원제, 새로운 시작을 돕는다.’
괜히 클릭해봤습니다. 별 기대 없이 읽기 시작했는데, 이상하게 그 글을 다 읽고 나서도 화면을 끄지 못하고 한참 멍하니 있었습니다.
이게 나한테도 해당될까?
지금 신청하면 뭐라도 바뀔까?
수많은 질문이 머릿속에 떠올랐고, 고민 끝에 신청 버튼을 눌렀습니다. 정확히 뭘 하게 될지는 몰랐지만,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겠다 싶었어요.
며칠 후 고용센터에서 문자가 왔고, 일정 안내와 함께 교육장 위치가 안내됐습니다.
지하철을 타고 교육장으로 향하는 길, 이상하게 손에 쥔 커피가 더 따뜻하게 느껴졌어요. 설렘이라기보다는 묘한 긴장감이었죠.
그렇게 낯선 공간,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제 두 번째 인생이 시작됐습니다.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던 첫날의 나
교육장에 들어갔을 때 저는 말을 아꼈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대부분 조용했어요.
정장을 입은 사람도 있었고,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온 분도 있었죠. 다들 얼굴에 말은 없었지만, 공통된 표정이 있었습니다.
‘나는 지금 어디쯤 와 있는 걸까’라는 질문.
첫 수업은 ‘자기경력 돌아보기’였습니다. 흰 종이를 한 장 나눠줬고, 지금까지 해온 일들을 적어보라고 했죠. 연필을 들었지만 한참 동안 아무것도 쓰지 못했습니다.
처음엔 ‘팀장’, ‘기획’, ‘보고서 작성’ 같은 단어만 떠올랐어요. 너무 평범했고, 너무 많아서 정리가 안 됐죠. 그런데 옆에 앉은 분이 종이에 ‘납기 조율’, ‘거래처 설득’, ‘밤샘 발표 준비’라고 쓰는 걸 보고 뭔가 울컥했어요.
그분은 저보다 한참 선배로 보였는데, 그 몇 줄의 단어들이 이상하게 제 가슴에 닿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조금씩 써보기 시작했어요.
‘매주 보고자료 50페이지 만들기’, ‘광고주 응대’, ‘사내 교육 기획’
별거 아닌 줄 알았는데, 적고 나니 그게 다 제 인생이었습니다.
느리지만 확실하게 바뀐 시선
며칠 동안 교육을 받으면서 하나씩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평생 회사에서 했던 일들은 그냥 노동이 아니라 경험이었고, 그 경험은 생각보다 꽤 쓸모 있는 것이더군요.
그 전엔 블로그도 그냥 기록용, 혹은 취미라고만 생각했는데, 상담 시간에 제 블로그 활동 얘기를 꺼냈더니 강사님이 눈을 반짝이며 물으셨어요.
“지금 운영 중이세요?”
“네, 몇 년 전부터 그냥 혼자 글 쓰고 있어요.”
“이거, 진짜 살려보시죠.”
그 말 한 마디가 이상하게 힘이 됐습니다.
내가 뭔가 해볼 수 있다는 확신. 아주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었어요.
그날 이후로 퇴근 시간 개념 없이 다시 블로그를 붙잡기 시작했어요.
전에 썼던 글들을 다시 다듬고, 검색어 트렌드를 분석하기 시작했어요.
예전엔 그냥 ‘글을 쓴다’였다면, 이젠 ‘누군가에게 필요한 정보를 만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게 전직지원제를 통해 제게 생긴 가장 큰 변화였어요.
실패가 아니라 전환의 신호였던 어느 날
물론 중간에 흔들린 적도 있었습니다.
전직지원제 교육을 마치고 재취업 매칭을 해주셔서 면접도 한 번 보러 갔는데, 결과는 탈락이었죠.
면접관은 표정은 밝았지만, 질문은 뻔했어요.
“이 분야는 요즘 빠른 속도를 요구하는데, 괜찮으시겠어요?”
“팀 내 연령대가 다소 젊습니다.”
나이와 속도를 문제 삼는 질문에 그냥 웃으며 대답했지만, 돌아오는 길에 속이 쓰렸습니다.
지하철 손잡이를 잡고 한참 창밖을 보며 생각했어요.
‘나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게 아니라, 나다운 방식으로 살고 싶었던 거잖아.’
그게 맞다면, 실패가 아니라 방향을 바꿔야 할 때였습니다.
그날 밤, 블로그에 다시 글을 썼어요.
“전직지원제를 통해 내가 깨달은 가장 큰 변화는 ‘내가 아직 괜찮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해준 것’이다.”
댓글은 많지 않았지만, 몇몇 분들이 공감해주셨어요.
그게 저에게 큰 위로가 됐습니다.
지금, 나는 다시 쓰고 있습니다
지금 저는 매일 새벽에 일어나 글을 씁니다.
트렌드 키워드를 분석하고, 어떤 주제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지를 고민합니다.
누군가는 이걸 생계형 블로거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이 일을 ‘내 이야기로 먹고사는 삶’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전직지원제는 그 출발점이었습니다.
나를 돌아보게 하고, 나를 정의하게 하고, 나를 다시 꺼내주는 통로였어요.
제가 만든 블로그 콘텐츠는 이제 수익으로 이어지고 있고, 중장년이라는 이름 안에서도 충분히 새로운 길을 개척할 수 있다는 걸 몸소 느끼고 있습니다.
같은 교육을 받았던 분들과 지금도 가끔 연락을 합니다.
어떤 분은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셨고, 어떤 분은 중고거래 앱을 통해 개인 판매자로 전업하셨습니다.
우린 모두 각자 다른 길을 걷지만, 시작은 같았어요.
‘더 늦기 전에 내 이야기를 다시 써보자’는 마음.
회사 퇴직을 결심하게 된 날, 내 머릿속에 있던 것들
항목 | 내 상황과 감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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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 부담 | 아이들 교육비, 대출 이자, 생활비, 부모님 병원비가 마음을 짓눌렀다 |
감정 상태 | 불안과 허탈함, 동시에 이대로 살 순 없다는 막연한 각성 |
몸의 반응 | TV만 멍하니 보며 무기력감, 생각은 많은데 손이 안 움직였다 |
질문 | 내가 앞으로 뭘 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의 시간이 헛된 건 아닐까? |
중장년 전직지원제를 처음 만났을 때의 내 심정
구분 | 느낀 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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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 접점 | 뉴스 자막에서 처음 ‘중장년 전직지원제’라는 단어를 마주함 |
첫인상 | 반신반의. 도움은 될 것 같은데, 실제로 내가 해당될까 싶었음 |
신청 계기 | 더 늦기 전에 뭔가를 붙잡고 싶다는 절박함 |
변화 시점 | 교육 첫날, 수첩에 나의 경력을 적는 순간부터 정체성이 흔들림 시작됨 |
교육을 받으며 달라진 나의 시선
이전 생각 | 지금의 시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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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는 그저 취미, 기록용 정도일 뿐 | 콘텐츠 기획 능력으로 인정받을 수 있음 |
나는 평범한 직장인에 불과해 | 나는 ‘디지털 콘텐츠 기획자’일 수 있음 |
재취업만이 답이다 | 스스로의 길을 개척할 수 있다는 확신 |
실패는 있었지만, 방향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상황 | 감정 또는 배운 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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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재취업 면접 탈락 | 아쉬웠지만, 나이 탓이라면 더 이상 그 틀에 머물 수 없다고 느꼈음 |
다시 블로그에 집중한 이유 | 누군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방향을 찾고 싶었기 때문 |
콘텐츠 제작 실습에서 얻은 확신 | 내가 남들보다 잘할 수 있는 게 바로 ‘쓰기’라는 점을 확신함 |
그날의 나에게 건네는 말
아직도 가끔, 퇴직 직후 그 허공을 바라보던 제 모습이 떠오릅니다.
괜히 냉장고 문 열고, 소파에 널브러져 있던 그때의 저에게 지금의 제가 말을 건넬 수 있다면 이렇게 말할 거예요.
“괜찮아. 네가 살아온 날들은 그냥 지나간 게 아니야.
그게 다 지금의 너를 만들었고, 앞으로도 널 살릴 거야.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도 헛된 게 아니야.
조금만 더 기다리면, 너도 너만의 속도로 길을 찾게 될 거야.”
지금도 여전히 불안하고, 여전히 매달 살아가는 느낌이지만, 예전과 다른 건 하나 있습니다.
나는 다시 나를 믿기 시작했고,
그 시작에는 ‘전직지원제’라는 문이 있었습니다.
그 문을 두드릴 용기만 있다면, 나머지는 시간이 해결해줍니다.
정말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