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마흔여덟, 그날 따라 허전했던 이유
요즘은 하루가 참 빨리 지나가요. 눈 떠보면 밤이고, 자려고 누우면 어느새 아침이에요. 예전에는 하루가 길다고 느껴졌는데, 요즘은 시간이라는 게 제멋대로 달려가는 느낌이에요.
그날도 그랬어요. 늦은 점심 먹고 책상 앞에 앉아있는데 괜히 마음이 허전했어요. 이렇다 할 이유도 없는데, 뭔가 머리가 멍한 느낌이 들더라고요. 딱히 바쁜 것도 없고, 꼭 해야 할 일도 없었어요. 그런데 손가락은 계속 마우스를 움직이고 있었죠.
인터넷 뉴스 몇 개 읽다가 문득 포털 검색창에 손이 가더라고요. 아무 생각 없이 ‘노인일자리 종류’라고 쳐봤어요. 왜 그걸 검색했는지 저도 정확히는 몰라요. 그냥… 미래가 걱정됐던 거죠.
그걸 본 순간부터 머릿속이 복잡해졌어요. ‘아직 마흔여덟인데 왜 벌써부터 이런 걸 걱정하지?’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래도 준비는 해놔야 하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 생겼어요.
살다 보면 이상하게 마음이 먼저 움직이는 날이 있어요. 그날이 딱 그랬어요.
처음 접한 노인일자리 목록에서 느낀 막막함
검색 결과에 나온 일자리 목록을 보는데 눈이 휘둥그레지더라고요.
실버카페 바리스타, 아파트 환경미화, 공원 정비, 경비원, 학교 급식도우미, 지역상담사, 전통시장 도우미, 주차관리… 한 페이지에 쭉 나열돼 있었어요.
처음엔 ‘생각보다 많네’ 싶었는데, 한참 보고 나니까 기분이 묘했어요.
아, 이게 다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일까? 이 중에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이 있을까?
막상 하나하나 자세히 읽어보니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예를 들면 공원 청소는 아침 6시부터 출근이라는데… 제가 요즘도 새벽에 허리 한번 삐끗하고 나선 운동도 안 하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몸을 쓰는 일은 자신이 없더라고요.
그렇다고 상담사나 도우미 같은 일은 말주변이 있어야 하는데, 전 평소에 낯가림이 심한 편이라 그것도 부담스럽고요.
결국 ‘이건 괜찮겠는데?’ 싶은 게 하나도 없었어요.
그렇게 노트북 화면만 멍하니 보고 있었는데, 순간 머릿속에 ‘내가 진짜 아무것도 못 하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스멀스멀 올라오더라고요.
주민센터 상담에서 마주한 현실
며칠 뒤, 근처 주민센터에서 노인일자리 상담을 한다는 걸 알고 방문해봤어요.
들어가자마자 친절한 직원분이 “신청 연령은 만 60세부터지만, 미리 알아보시려는 분들도 꽤 많아요”라고 하시더라고요. 그 말에 괜히 안도했어요.
상담을 받으면서 그동안 몰랐던 사실을 많이 알게 됐어요.
일단 인기 있는 일자리는 경쟁률이 엄청 높고, 대부분이 선착순이에요.
그리고 일주일에 2~3일만 근무하는 자리가 많고, 급여는 월 30만 원 전후더라고요.
생계형보다는 ‘사회참여’와 ‘건강 유지’를 위한 개념이 강하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긴 했는데… 마음속에선 자꾸 숫자 계산을 하고 있었어요.
“이걸로는 생활비가 안 되잖아… 보험료는 어떡하지… 모아둔 돈도 딱히 없는데…”
괜히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무렵, 상담사 분이 한 마디 하셨어요.
“경제적인 이유로 시작하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일하다 보면 오히려 정서적인 안정감을 얻는 분이 더 많아요.”
그 말이 뭔지는 그땐 잘 몰랐는데, 나중에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됐어요.
아파트 경비로 첫 출근… 하루 만에 현실 자각
한 달쯤 후, 이웃의 소개로 아파트 경비 일자리를 얻게 됐어요.
몸은 힘들겠지만 일단 해보자는 마음이었죠.
첫날은 엄청 떨렸어요. 직원들한테 인사도 어색하고, 주민들 눈치도 보이고… 가장 힘들었던 건 CCTV 보는 일이었어요. 이게 의외로 눈이 엄청 피곤하더라고요.
근데 진짜 위기는 며칠 뒤에 왔어요.
한밤중에 갑자기 경비실로 전화가 온 거예요. 고양이가 쓰레기봉투를 뜯어놨다며 누가 좀 와서 치워달라고…
정말 별거 아닌 일인데, 새벽에 불려나가는 게 생각보다 큰 스트레스였어요.
더군다나 아침에 일어나면 무릎이 뻐근하고, 허리도 욱신거리더라고요. 한 달도 안 돼서 ‘아, 이건 내 일이 아니구나’ 싶었어요.
사직서 낼 때 너무 민망했어요. 뭘 그리 못 견디냐는 눈빛을 받았거든요.
근데 정말 힘들었어요.
집에 돌아와서 아내한테 “나 그만뒀어”라고 말하니까, 아내가 말없이 따뜻한 국을 데워줬어요. 그게 위로였는지, 야속함이었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어요.
도서관에서 찾은 작지만 따뜻한 일
경비 일을 그만두고 나서 며칠간은 멍했어요. 그러다 우연히 구청 홈페이지에서 지역 도서관 어르신 일자리 모집 공고를 봤어요.
책 정리, 안내 보조, 어린이 프로그램 도우미 같은 일이더라고요.
일단 신청서 넣고 기다렸는데, 정말 운 좋게 면접 연락이 왔어요.
면접날은 긴장돼서 새 양복 입고 갔어요. 거기서 “최근에 읽은 책 있으세요?”라는 질문을 받았는데, 갑자기 말문이 막히더라고요.
순간 생각난 게 예전에 읽었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그 책 이야기를 꺼냈더니 면접관이 웃으면서 “저도 그 책 좋아해요” 하더라고요.
며칠 후 합격 통보를 받고 진짜 기분이 좋았어요.
근무는 일주일에 이틀, 오전 시간에만 있었고, 업무도 무리 없었어요.
무엇보다 좋았던 건 사람들과의 대화였어요.
아이들이 와서 책 제목 물어보면 같이 고민해주고, 어르신이 책 위치 찾으시면 직접 안내해드리고… 이런 소소한 일이 참 뿌듯하더라고요.
일이 끝나고 동료들과 커피 한 잔 마시면서 잡담 나누는 그 시간이 너무 좋았어요.
사람을 통해 다시 살아간다는 느낌
도서관에서 일한 지도 어느덧 1년이 넘었어요.
물론 일당은 많지 않아요.
그렇지만 정신적으로 안정되는 게 커요. 매일 누군가와 눈을 마주치고, 이름 불러주고, “고생하셨어요”라는 말을 들으니까요.
그중에 마음 맞는 동료가 생겨서 요즘은 퇴근 후 같이 동네 산책도 가요.
처음에는 일자리를 구하려고 시작했는데, 지금은 인생 친구가 생겼어요.
그리고 블로그도 다시 쓰기 시작했어요. 예전엔 트래픽만 보고 키워드에 목매었는데, 요즘은 내가 뭘 느끼고, 뭘 겪었는지를 솔직하게 쓰는 게 더 좋아졌어요.
누가 읽든 안 읽든, 그냥 하루하루 기록을 남기는 것 자체가 의미 있게 느껴져요.
내가 직접 알아봤던 노인일자리, 솔직한 느낌 정리표
일자리 종류 | 해본 경험 여부 | 느꼈던 장단점 | 하고 나서 든 생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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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경비 | O | 근무 시간 길고 새벽 호출 있음. 겨울엔 특히 힘듦. | 체력 없으면 진짜 오래 못 하겠구나 |
공원 환경 정비 | X | 새벽 출근, 육체노동 중심, 정기적 수당 있음 | 체력 되면 해볼 만하겠지만 고민됨 |
도서관 업무 보조 | O | 몸은 덜 힘들고 정서적 만족 큼. 사람 만나는 게 즐거움 | 이건 오래 해보고 싶다는 생각 듦 |
실버카페 바리스타 | X | 교육 필요, 감성 일자리. 젊은 고객 많아 자신 없음 | 언젠간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은 있음 |
전통시장 도우미 | X | 물건 정리, 상인 지원 업무. 활동성 많고 정신없음 | 말수가 적은 나에겐 쉽지 않아 보임 |
그날의 선택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터닝포인트 정리표
계기나 상황 | 그때 느낀 감정 | 바뀌게 된 계기 |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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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일자리’ 검색했던 날 | 막연한 불안감, 마음의 공허함 | 뉴스에서 본 고령 빈곤 통계와 주변 얘기 | 그때 클릭 안 했으면 지금처럼 못 변했을 것 같음 |
주민센터 상담 받으러 갔을 때 | 어색함과 부끄러움 | 상담사의 조언 한마디 “정서적 안정감이 커요” | 그 말이 자꾸 떠오르고 현실이 되더라 |
경비직 하던 시절 | 매일 몸이 무겁고, 새벽이 두려웠음 | 새벽 눈 오는 날, 혼자 염화칼슘 뿌리며 자괴감 | 이건 나랑 안 맞는 일이었구나 배움 |
도서관 첫 출근했던 날 | 설렘 반, 긴장 반 | 아이들 물음에 답하며 느낀 작고 따뜻한 보람 | 지금도 그 기분이 자주 떠오름 |
블로그 다시 쓰기 시작한 시점 | 트래픽 걱정에 지쳐 있었음 | 누군가 “글이 위로됐다”고 댓글 남긴 순간 | 글이 나를 살리고 있다는 걸 알게 됨 |
마음에 오래 남은 한마디
예전에 도서관 선배님이 하신 말이 있어요.
“우린 늙어서 쓸모가 없는 게 아니라, 아직 필요한 자리를 못 찾은 거야.”
그 말이 자꾸 떠올라요.
정말 그래요. 나이 들었다고 끝이 아니고, 몸이 약해졌다고 무능한 것도 아니에요.
내가 잘할 수 있는 걸 찾으면, 그건 나만의 역할이 되더라고요.
앞으로도 계속 고민할 거예요. 이 나이에 무얼 할 수 있을까, 어떤 일이 내 삶에 힘을 줄까.
근데 지금은 하나 확실해요.
‘일’을 찾다가 ‘의미’를 찾았다는 것.
그게 제일 큰 수확이었어요.